1.조성기

주진융(周鎭隆)은 원래 사컹촌 주민들처럼 원적(原籍)이 포산(佛山)의 난하이현(南海縣)이었다. 1950년대 초 포산공항을 건설하느라 촌 자체가 난하이현에서 판위 사완진 사컹촌으로 이주를 했다. 사자춤은 남사자(醒獅라고 함)와 북사자로 나누어졌는데, 광동 포산 난하이는 남사자춤의 발원지이다. 주진융과 그의 촌민은 판위 사컹에 정착했고 난하이의 남사자의 전통 민간예술을 계승했다. 1997년 주진융은 촌 위원회와 함께 사컹촌사자춤단(沙坑村龍獅團)’을 결성하기로 결정하였고 이후는 이를 토대로 사컹촌의 문화를 발전시키기로 했다. 그리하여 사자춤단이 생기고 단원들이 생겼고 주진융은 사차춤단의 단장이 되었다.

이로부터 주진융은 사자춤단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게 된다.



2. 발전기

사컹촌사자춤단의 남사자대(醒獅隊)가 생긴 지 1년이 되지 않아 제1회 전국남북사자춤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남사자조에서 준우승을 하게 된다. 이듬해에는 해외로 나가 프랑스 파리의 국제 수사자 경연대회에서 영예의 우승을 하게 된다. 그 후 1년간의 시간 동안 황비홍배(黃飛鴻杯) 사자왕경연대회에서 사자춤 왕중의 왕 칭호를 얻게 되며 동시에 최고배음상(配音獎)을 받게 된다. 1998년 쑤저우(蘇州) 국제사자춤축제 및 전국 제2회 남북사자춤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얻는다. 이어 중국 국가A팀을 대표하여 98선쩐 제3회 국제사자초청대회에 참여하여 우수상을 받는다. 같은 해, 광동 음악문화청은 사컹촌에게 민족민간예술의 고향이라는 칭호를 내려 주었다.



3. 전성기

5-6년 동안의 노력으로 사컹촌은 초등학생부터 스무살의 청년까지 모두 남사자춤게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사자춤 단원은 계속 생겨났다. 주진융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사컹촌사자춤단을 브랜드화하기 위해 더욱 많은 단원을 양성하였다. 이에 2000년 사컹촌은 중국사자춤운동협회에 의해 중국국가사자춤집중훈련팀으로 지정되었다. 이 중요한 결과는 사컹촌의 사자춤 문화의 발전에 기초를 다지는 역할을 했다. 승승장구 기회를 몰아타고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주진융의 사컹사자춤단을 훈련, 공연, 경연이 일체화시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의 문화사업을 고리에 고리를 물고 연결시키려는 것이었다.

애초에는 연습장소도 협소했으나 큰 강당을 지어 옮김으로써 더욱 많은 관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더불어 관중들도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기존에 경기와 공연을 하던 장소는 보잘 것 없었으나 깔끔하게 단장을 한 표준체육관이 지어진 것이다.

사자춤은 체육과 경기가 결합된 민간예술로서 본연의 예술적인 매력과 독특한 예술언어를 가지기 때문에 많은 여행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지금 사컹촌은 국제청년사 홍콩관광국이 지정한 명소가 되어 수만 명의 홍콩과 광동 관광객을 유치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중고등학생에게 가장 인기를 끄는 명소가 되었다. 홍콩에서는 200-300개의 관광단이 와서 사자춤을 관람한 적이 있다. 많을 때는 하루에 십여 대의 버스에 1000명이 참관한 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