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연앵(陳燕鶯, , 19271999)은 판위 사완 사람으로, 유명한 남방 음악 대가이자 성공(星腔)의 명인이다.

그녀는 맹인이었던 진감(陳鑑)의 차녀로서,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유명한 멜로디언 대가인 오빠 진대매(陳大妹)로부터 예술을 배워 집안의 남음(南音)을 계승하였다. 남음의 음색은 청아하며 음역은 넓고 두터운데 그녀가 창을 하면 유창하고 구성진 맛이 있었다. 그녀의 창법은 고아하면서도 낭랑하여 부친의 남음의 곡목을 부를 때는 곡의 인물성격을 정확하게 표현하여 때로는 감정이 격앙되어 우렁차기도 하고 때로는 슬픔이 애절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논물을 흘리게 하였다. 진연앵은 창을 잘하기도 하고 직접 곡을 편집하기도 했으며 여러 악기를 다루는 일에도 능하여 50년대 초반에 이미 광동 음악계의 호평을 받은 사람이다.

 


진연앵은 집안이 가난하여 12세부터 부친과 함께 판위 시차오(市橋) 일대에서 노래를 하며 지냈다. 그녀는 처음에는 자후(子喉)’를 불렀으나 한번은 우연한 기회에 축음기의 한 배우가 노래하는 《추분(秋墳)》을 듣고 성강(星腔)의 매력에 빠져 평후(平喉)로 바꾸어 성강을 열심히 연습하게 된다. 1952년 그녀는 광동 음악곡예 친목회에 참가하게 되는데 그 모임은 광저우시 중구 곡예단 제1팀과 수화곡예단(穗花曲藝隊)의 핵심 독창팀 및 병창 배우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소방(李少芳), 웅비영(熊飛影) 등의 명창들도 모두 이 친목회 출신이다.


195010, 자신이 작곡하고 연주하며 노래한 《가창농촌신면모(歌唱農村新面貌)》가 베이징의 제1차 곡예참관대회에서 2등상을 받게 되는데, 이때 공연에 참여자들은 주은래 총리의 접견을 받게 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다. 이때 중앙악단(中央樂團)의 유명한 매조소프라노 나천선(羅天嬋)이 진연앵에게 그 노래를 불러주고는 악보를 그 악단에 남기게 된다. 30년 후 강택민 주석은 이 곡에 강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1962년 그녀는 다시 자신이 창작한 남음(南音) 《이수개가(二嫂改嫁)》라는 곡으로 광저우시 제1차 양성음악회에 참가하여 우수상을 받게 된다. 그의 예술세계가 막 절정에 오를 즈음 1964년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적인 원인으로 그녀는 26년 동안 몸 담고 있던 가수의 길을 벗어나 인쇄소에서 제본공으로 일하게 된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37세였다.


28년 후 그녀는 홍콩에서 친구인 양동(梁棟), 진문걸(陳文傑) 등과 음악에 대해 교류하고 있던 중, 홍콩의 성강(星腔) 연구가인 여패연(黎佩娟)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다. 1992년 여패연의 특별한 초청으로 홍콩의 성강명곡연창회(星腔名曲演唱會)’지수남음(地水南音)’, ‘소명성창곡시범강좌(小明星唱曲示范讲座)’ 등에 두루 참여하게 된다. 그녀가 부른 성강의 명곡인 《추분(秋墳), 《치운(癡雲) 및 부친의 첫 남음 작품인 《민자어차(閔子御車), 《주씨반가(周氏反嫁) 등을 들은 청중들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듬해 그녀는 다시 초청을 받아 홍콩시정국()이 주최하는 중국음악제에 참가하여 홍콩, 마카오 지역의 남음 대가인 당건원(唐健垣), 완조휘(阮兆輝), 구균상(區均祥), 감명초(甘明超) 등과 같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게 된다. 그녀는 부친의 명곡인 《주씨반가(周氏反嫁), 《오한살처(吳漢殺妻)》를 부르게 되는데 뭇사람들과 다르게 따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주씨반가》를 병창할 때는 감동의 논물을 흘리는 청중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19957월 광저우시 월극월곡학회(粤劇粤曲學會)’가 주최하는 이브닝콘서트가 있었다. 이때 광동성, 광저우시, 미국, 영국, 홍콩, 마카오의 음악가들이 출연하여 고극(古劇), 명곡, 명강(名腔) 등을 펼쳤는데, 진연앵은 부친의 《민자어차(閔子御車)》를 부름으로써 고희(古稀)의 나이가 되어서 비로소 31년 간 정들었던 광동음악계를 은퇴하게 된다.

1977년 판위시곡협(番禺市曲協)과 사완진 관청은 특별히 그에게 남음대사(南音大師)라는 칭호를 주고 그를 위해 성강 명가 진연앵 판위시 성강 예술감상회(星腔名家陈燕莺暨番禺市星腔藝術欣賞會)’를 열어 준다. 이때 그녀는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고향 사람들을 위해 《주씨반가(周氏反嫁)》를 부르게 되는데, 고향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이것은 아버지로부터 진씨남음(陳氏南音)’을 그대로 물려받아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음을 말해준다.


만년의 진연행은 계속 성강의 창법을 연구하고 성강의 자료를 수집하고 성강의 명곡 및 고곡(古曲) 20여 곡을 베껴 적었다. 또한 종종 판위의 월곡을 배우는 후학을 위해 가르치기도 했다.

이밖에도 그녀는 저명한 작곡가 류한내(劉漢鼐) 선생과 합작으로 부친의 남음 《금련희숙(金蓮戱叔》을 정리해 《남국홍두(南國紅豆)》라는 잡지에 발표했다. 임종 전, 반 년 동안 그녀는 60년대 편찬한 자후(子喉) 독창곡 《청문(晴雯)》을 새로 개편하기도 했다.

 


진연앵의 큰오빠 진대매는 다양한 재주를 가진 멜로디언 연주자였다. 일찍이 여동생을 데리고 아버지와 함께 음악을 팔며 생계를 이었다. 줄을 뜯어서 소리를 내는 악기는 뭐든 잘 다루었는데 종종 배우 웅비영(熊飛影)를 위해 이현(二弦) 반주를 해주었다. 후에 몸이 약해 일찍 음악계를 떠났다. 50-60년대의 음악계는 진대매, 진연앵, 진대매의 딸 진려경(陳麗卿), 진려영(陳麗英)을 일러 진가사걸(陳氏四傑)’이라고 칭한다.

1998년 진연앵은 불치병을 얻는다. 광동음반출판사는 그녀를 위해 성강 명곡을 담은 CD를 제작해 줌으로써 광동 음악계에 풍부한 유산을 남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