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병림(何炳林, 1918~2007)은 중국이 처음 원자탄을 개발할 때의 막후공신이다. 중국사회과학원 원사, 고분자화학 전문가, 중국 이온교환수지 공업의 창시자이며 난카이대학(南開大學) 고분자화학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그는 19188월 광동성 판위현 사완촌에서 태어났다. 광저우 배정중고등학교(培正中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938년 서남연합대학(西南聯合大學) 화학과에 입학했다. 1942년 졸업하고 1942년에 중국의 저명한 화학자인 양석선(楊石先) 교수의 대학원생이 되었다.

그는 사람됨이 정직하고 과학적인 사고가 진지하여 양 교수가 그를 높이 평가해주었다. 대학원을 마치고 그 대학에 남아 교수가 되었다가 항일전쟁 승리 후 난카이대학 화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1947년 하병림은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남가주대학 대학원과 인디아나대학의 대학원에서 공부를 계속한다. 각고의 노력으로 주경야독을 한 결과 4년 후인 1952년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1951년 가을에 미국 정부는 중국유학생을 강제로 억류하는 정책을 시행하여, 이공계, 농학, 의학을 배운 중국유학생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법령을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할 수없이 미국의 수처리 전문업체인 날코(NALCO)에서 수처리 약물로 쓰이는 농약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지식과 기술이 중국 건설에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후에는 향후 중국도 원자력 사업이 반드시 발전할 것이라고 믿고 연구방향을 이온교환수지로 바꾸었다. 그의 능력과 우수한 작업성과를 회사가 인정해주어 2년 후 그는 급 연구원이 되었다.

 


미국에서의 업무와 생활조건은 매우 만족했지만 하병림은 언제나 중국 생각뿐이었다. 그는 열심히 일하면서 사방팔방으로 자신의 처지를 호소했다. 미국 정부를 상대로 귀국신청서를 내기도 했다. 또 하병림 부부는 십여 명의 중국유학생과 공동으로 주은래(周恩來) 총리에게 편지를 썼다. 이에 1954년 주은래 총리는 중국 대표단을 인솔해 제네바에 가서 담판을 짓게 되었다. 미국 대표인 존 덜레스(John Foster Dulles) 국무장관은 중국유학생을 억류한 사실이 없다고 한사코 부인했다. 이에 주은래 총리가 하병삼과 그 일행의 편지를 보이자 미국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955년 봄, 미국 정부는 마침내 하병삼의 귀국을 허락했다. 19562, 하병삼과 부인 진여옥(陳茹玉)10년이나 떨어져 있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그의 모교인 난카이대학을 방문했을 때, 그의 스승인 양석선 교수 일행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난카이대학 유기화학연구실에서 2년 간 교수를 역임하면서 그는 농약과 이온교환수지 방면에 각별한 업적을 남겼다.


1958년 하병림은 고분자연구실을 설립하고 주임이 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끊임없는 성과를 이룩했는데 연구를 거듭할수록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십 년의 문화대혁명 기간에 그의 교육과 연구는 중단됐지만 1980년 이후 그의 실적은 다시 공전의 발전을 기록하게 된다. 1980년 그는 난카이대학 화학과 학과장이 된다. 같은 해 그는 전국노동모범자로 인정받고 중국과학원 학술위원 원사(院士)로 선출된다. 1981년에는 당시 설립 중이던 분자생물연구소의 소장을 겸임하게 된다. 1982년 난카이대학이 기존 화학과 소속 고분자연구실고분자화학연구소로 격상시키자 하병삼이 소장을 맡게 된다.

1986년에는 난카이대학은, 하병삼이 1958년 설립한 난카이대학 화공공장을 고분자화학연구소에 합병하여 연구소가 공장을 운영하게 함으로써 화공공장의 생산과 고분자화학연구소의 연구발전을 촉진하게 된다. 1985년 국가교육위원회는 난카이대학과 텐진대학(天津大學)이 지원하여 칭다오대학(靑島大學)을 신설하게 하는데 이때 하병삼은 칭다오대학의 초대 총장을 겸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