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류당(何柳堂, 1872~1933)은 자가 여향(與香)이며 아명은 삼()이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를 대두삼(大頭森)’이라고 불렀다. 사완 북촌사람이다. 조부는 하박중(何博衆)이며 부친은 하후기(何厚祺)이다. 조상 때부터 원래 고향의 이름난 부잣집이었는데 큰아버지 대에 이르러 집안이 몰락하기 시작해 삼촌들은 모두 도생을 위해 객지로 흩어졌다.

 

하류당은 독자로 나서 어릴 때부터 고향에서 사숙하며 경전과 학문을 익혔다. 후에는 학문은 버리고 무예를 연마하는 일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대관도(大關刀)를 휘두를 줄 알고 활을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그리하여 20세가 되는 해에 광저우의 지방 무과시험에 참가하여 중무수재(中武秀才)가 된다. 그런데 얼마 후 청나라가 과거를 전면 폐지하게 되자 하는 수없이 무예를 버리고 다시 글을 익히며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는 문장력도 좋고 글씨도 탁월했다. 총명함도 남달랐고 다재다능하여 고향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볼 정도였다. 그는 원래 음악 가정에서 태어난 덕분에 어릴 때부터 음악과 희곡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또 향리의 공인된 각색 명인 설보요(薛保耀)와 종종 월극에 대해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가 찬조출연을 할 능력을 갖추었을 때는 《삼랑교자(三娘教子), 《거사관도(擧獅觀圖, 《왕언장탱도(王彦章撑渡) 등의 전통 월극에 연출했는데 그의 연기는 전문배우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이후에 용선경기를 수차례나 관찰하고 조부의 유고인 《군주양도(群舟攘渡)》라는 악보를 거듭 다듬고 윤색하고 각색하여 마침내 《새룡탈금(賽龍奪錦》이라는 곡을 창작해낸다. 이 곡은 빠르고 느린 리듬을 잘 조화한 기법, 즉 저정(底叮)과 저판(底板)을 사용한 절분음(切分音)을 채용하여 웅장하고 활발하여 새로운 격조를 보인다. 또 강건하고 우렁차며 격앙된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하므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총체적으로 중화민족의 생기발랄함을 표현하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의 정신을 잘 갖추고 있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그는 생계를 위해 고향을 떠나 홍콩으로 가서 문과를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된다. 중화민국 9(1920)에 이르러 그는 홍콩의 종성(鐘聲)자선회사 부속 극단에서 일하게 되는데 광동 음악 명사인 엄로열(嚴老烈), 라기운(羅綺雲) 등과 함께 광동 음악의 개혁과 발전에 관해 토의하게 되는데 이때 세운 공헌이 지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극단은 자금이 넉넉할 뿐만 아니라 郭琳爽、曾三多、靓少凤、少昆仑、冯镜华、陈非侬、陈非我 등 많은 유명 가수를 확보하고 있었다. 또 그림 자료가 많이 든 대형 월간잡지 《종성(鐘聲)》을 출판하고 있었다. 이 월간지에는 매월 그 극단의 스틸 사진과 악보가 표기된 월극이 실렸으며, 《육랑죄자(六郎罪子), 《위성겸접(危城鶼鰈)》과 같은 월곡의 한 단락이 담겨져 있었다. 그 중에는 하류당의 이름이 표기된 곡의 악보도 많이 인쇄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월극과 월곡의 보급과 혁신에 큰 공을 세운 잡지였다고 할 수 있다.

《종성》 잡지사에는 적지 않은 강습생이 있었는데, 하류당은 교사를 맡고 있었다. 강습생 중의 신월 레코드사의 기둥이었던 전대숙(錢大叔), 윤자중(尹自重), 하대사(何大傻), 여문성(呂文成)은 광동 음악의 사대천왕(四大天王)’으로 불리웠다.

 

이후 하류당은 고향의 형제, 아들, 조카들과 함께 광주 하남에 있던 광동 음악가 송화파(宋華波), 송욱문(宋郁文) 등과 교류하게 된다. 또 사대천왕과 종종 연주하기도 하고 레코드판을 취입하기도 하여 월극과 광동 음악의 창작과 보급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중화민국 10(1921)을 전후로 그는 대산현(臺山縣)의 구학주(丘鶴儔)가 《금학신편(琴學新編) 두 권을 편찬할 때 전심전력으로 교정해주고 그 책의 서문을 써주게 된다. 이러한 행적은 광동 음악의 연구에 중대한 영향을 준 것이다.

 

중화민국 9(1920)에서 19(1930)은 하류당의 예술창작이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 중화민국 21(1932)에 이르러 그는 모든 업을 놓고 사완으로 돌아와 한가히 지내자니 아무 수입이 없어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가 작곡한 《수양삼복(垂楊三復)》도 첫머리만 쓰고는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후에 사촌동생 하여년이 이 곡을 마침내 완성했다.

이듬해 병을 얻어 끝내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전대숙 일행이 조문을 와서 그의 비파를 사주었다. 기념으로 삼으려는 뜻도 있고 눈물로 송별하며 도와주려는 뜻도 있었다.

 

하류당의 대표작은 《새룡탈금》으로 광동 음악의 대표적인 곡이라고 할 수 있다. 《회문금(回文錦), 《칠성반월(七星伴月), (취옹로월醉翁撈月), (효몽제앵曉夢啼鶯) 등 십여 수가 더 있다고 하나 악보가 없어 수집하기 힘든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