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소하(何少霞, 18941942)의 이름은 진거(振渠) 또는 진지(振篪)라고도 하며 자는 건조(乾調), 판위 사만 북촌의 아중방(亞中坊) 사람이다. 증조부는 하혜암(何惠巖)이며 조부는 하국헌(何菊軒)인데 하후구(何厚口)라고도 하였는데 일찍이 장수성(江蘇省) 보응현(保應縣)에서 지현(知縣)이라는 벼슬을 지냈다. 아버지는 하여락(何與諾)이다. 형인 하진훈(何振勳)은 광동고등정법학교를 졸업하고 탄탄하게 조직된 해풍현(海豊縣) 농민혁명 정권의 관공서에서 일했다. 후에는 변호사 신분으로 서문현(徐聞縣)의 현장을 지냈다. 아우인 하진통(何振通)은 황포군사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1937년 졸업 후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광저우시의 초등학교에서 퇴임할 때까지 줄곧 근무하였다.

 


하소하는 책 향기가 가득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매한 교양을 갖출 수 있었다. 그는 광저우 교충중고등학교(教忠中學)에서 공부할 때 5.4운동을 맞아 사상이 비교적 개방적일 수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광동 음악을 공부해 비파와 삼현 및 각종 악기를 고루 다룰 수 있었고 악곡을 창작하고 여배우를 위해 곡을 지어주기도 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본선여자초등학교(本善女子小學)와 후에 명덕초등학교(明德小學)라고 불린 학교, 상현중학(象賢中學)의 전신인 사완중학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이러는 중에도 멀리 계신 숙부인 하류당, 하여년, 하소유 등과 광동 음악의 연주, 창작, 평론 등의 문제를 토의하기도 했다. 연주에 있어 그는 하소유의 비파와 더불어 고향에서 최고라고 인정받았다. 하소유는 오랜 기간 바깥에서 벼슬을 하는 바람에 비파 연주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소하는 비파의 신이라는 칭호까지 들었다.

 


1920년대 말, 하소하는 광동 음악의 명인인 여문성(呂文成), 윤자중(尹自重), 하대사(何大傻) 및 서양 음악작곡가 하안동(何安東) 등과 두터운 교류를 나누었다. 그들은 종종 사완에 손님의 신분으로 왔는데, 저명한 가수 장월아(張月兒), 서류선(徐柳仙) 등은 그들에게 종종 곡예에 대한 가르침을 청하였고 하소하 일행은 가수들을 위해 곡을 지어주기도 했다. 장월아는 당시 평후창가(平喉唱家) 중의 한 명이었는데, 그녀가 처음으로 부른 명곡 《유자비추(游子悲秋)》와 《일대예인(一代藝人)》은 하소하가 그녀를 위해 지어준 것이었다.

 


유명한 영화배우 완령옥(阮玲玉)의 타계를 추도하기 위해, 하소하는 그녀의 일대기를 주제로 해서 완벽하게 지은 것이 바로 《일대예인(一代藝人)》이라는 월곡(粵曲)이다. 장월아가 이 노래를 부르자 그 구슬픈 곡조가 자못 사람의 심금을 울렸고 노래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열정적인 환영을 받았다.


신월레코드사의 경영인 전대숙(錢大叔)은 색소폰을 잘 부는 것으로 유명했다. 여문성(呂文成)은 얼후 연주에 능했고 자후(子喉)를 잘 불렀으며, 윤자중(尹自重)은 바이올린을 잘 켰고 하대사(何大傻)는 드럼 연주를 잘 했다. 그래서 이들 넷을 사람들은 사대천왕(四大天王)’이라고 불렀다. 1930년대 초에 그들은 하소하의 요청으로 함께 상하이에 가서 비파 연주를 위주로 많은 광동 음악을 취입했다. 그 안에는 하류당과 하여년, 그리고 하소하 자신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소하는 광동 음악 및 월곡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는 평생 수많은 광동 음악을 남겼다. 《뇌봉석조(雷峰夕照)), 《여궁수희(呂宮水戲), (하리파인下里巴人), (약류영풍弱柳迎風), 《맥두류색(陌頭柳色), 《우의무(羽衣舞), (백두음白頭吟), 《봉접쟁춘(蜂蝶爭春)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그는 원래 그 당시 장월아와 서류선 등 4대 평후창가(平喉唱家)를 위해 많은 월곡을 창작했으나 지금 고증할 수 있는 것은 《유자비추(游子悲秋)》와 《일대예인(一代藝人) 두 곡밖에 없다. 또 하섭천(何躡天), 등분(鄧芬)과 공동으로 제작하여 서류선이 부르게 한 《몽각홍루(夢覺紅樓)》도 그의 작품이다. 그 외에 어떤 작품이 있었는지는 다시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당시는 광동 음악이든 월곡이든 작곡가들이 스스로 즐기는 것에 만족했고, 어떤 작곡료를 받은 것도 아니고 서명을 남기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을 수밖에 없다.

 


하소하는 나라가 많이 어지러울 시기에 일군에 의해 함락된 고향에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 신분으로 매월 약간의 곡식을 봉급으로 여덟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말년에는 나라가 피폐해지고 국민의 삶이 곤궁해짐을 가슴 아파하면서 《백두음(白頭吟)》과 《야심침(夜深沉)》이라는 작품을 지었는데, 이 비분강개하는 광동 음악은 뭇 대중의 공명을 불러 일으켰고 마침내 광동 음악을 대표하는 명곡이 되었다. 최후에 그는 질병과 가난을 안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