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년(何與年, 18811962)의 이름은 수인(樹人)이며 여년은 그의 자인데 사완 북촌 출신이다. 그의 조부인 하박중은 비파연주가이자 작곡가이다. 부친 하후사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가정이 어려워졌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숙을 했는데 특히 서예를 좋아해 기본기가 착실히 다져져 있었다. 자라서 큰형 하여선(何與宣)을 따라 광저우로 가서 관청에서 기록원이 되었다. 중화민국이 들어서고 관청이 흩어지는 바람에 그는 사완 고향으로 돌아와서 살게 되었다. 그는 일찍이 아내를 잃고 평생을 혼자 살았다.

 


하여년은 비파, 삼현(三弦), 얼후(二胡), 양금 등 현악기의 연주에 능했다. 나아가 사촌형 하류당(何柳堂)의 세심한 가르침을 받아 광동 음악의 창작에 힘썼다. 그중 《소원춘회(小苑春回)》는 하류당이 인정한 최고의 작품이다. 하여년은 서양음악의 영향을 받아 그 기예를 연마하고 나아가 창작에 힘썼는데 특히 개성이 강한 민주사상을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창작에서 내심의 세계를 경쾌하게 표현하기를 좋아했는데 하류당의 근엄하면서도 고박한 면과 비교하면 또 다른 맛이 있다.

 


1931년 하류당이 신월레코드사의 부탁으로 상하이에 가서 그가 창작한 《새룡탈금(賽龍奪錦》과 《회문금(回文錦)》을 취입하게 될 때, 하여년도 함께 그 과정에 참여하게 됨으로 해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상하이에 있는 동안 북방 음악 인사들과 두루 교류를 하게 되고 그 가운데 전통적인 비파 명곡인 《십면매복(十面埋伏)》의 정교한 기법을 배우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연주기교를 풍부하게 하고 창작수준도 더 높일 수 있게 되었다.

 


1935년 하여년 홍콩으로 가서 음악교육을 업으로 삼게 되는데 이 기간에 진후(), 요한걸() 등 유명한 음악가를 양성하게 된다. 또한 하소하(何少霞), 윤자중(尹自重), 여문성(呂文成), 맥소봉(麥少鋒), 이가(李佳) 등과 함께 레코드를 취입하게 된다. 일본군에 의해 광저우와 홍콩이 함락되는 시기에 그는 마카오로 피신하게 된다. 이후 윤자중 등과 함께 다시 홍콩으로 가서 레코드를 취입하는데 비파연주를 위주로 하고 가끔 삼현과 양금도 곁들였다.

1941년 항전이 고난의 단계에 진입할 때, 그는 돌연 민족의 정의감이 되살아났다. 그리하여 민족의 투지를 일깨우는 악곡 《해랑(駭浪)》을 완성하게 된다.

이 곡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성난 파도가 아무리 거세어도 반석을 부술 수는 없고 오히려 단단해지기만 한다네.”

 

항전 승리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의 음악 애호가들과 음악을 연주하고 연구하게 된다. 아쉽게도 비파연주의 대가인 하소하는 일군(日軍)의 점령기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그는 하소유(何少儒)의 비파연주 기예와 더불어 고향에서 최고라는 칭호를 듣게 된다. 그가 고향 사완에 있는 동안 가장 마지막에 창작한 것은 1947년 설에 창작한 《춘광명미만가환(春光明媚萬家歡)》이라는 악곡이다. 이 곡은 섣달 그믐날 저녁에 부자들은 술잔치를 벌이며 떠들썩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고통에 신음하는 현실을 묘사했다. 그는 이런 강렬한 비교를 통해 세상의 불평등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하여년은 고향을 떠나 다시 홍콩으로 가서 이전처럼 음악교육에 종사하게 된다. 홍콩에 있는 동안 그는 차오저우 음악을 접한 후 차오저우 음악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오야요문일마성(午夜遥聞鐵馬聲)》을 작곡하게 된다. 또한 이때 처음으로 월극(粵劇)에 배경음악을 삽입하게 되는데 《새외비파운외적(塞外琵琶雲外笛)》이 그 대표작이다. 1961년 가을에 그는 한 곡예단을 인솔하여 광저우에서 공연을 하게 되는데 이때 《어해(御侮) 등 두 곡을 쓰게 되었다.

 


하여년은 창작 외에도 월극의 곡조와 표현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월극에서 특정 글자를 길게 늘여서 발음할 때 그것이 반드시 인물의 성격과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당시의 월극이 음악을 이용하여 분위기를 살리는 기법이 부족하여 공연장이 적막하다보니 관중들의 호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여러 음악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어떻게 하면 공연장을 활기차게 할 수 있을지를 연구했다. 극의 내용전개에 있어서도 매끄럽게 연결시켜주는 음악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음악적인 수단, 시그널뮤직을 월극에 처음으로 탄생시킨다. 뒤에 월극의 시그널뮤직은 계속 발전하여 독립적인 광동의 음악이 되었다. 그가 월극의 곡조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자 당시 유명한 월극반들이 모두 그를 찾아와 새로운 곡조의 가르침을 받곤 했다.

 


1962년 하여년은 홍콩에서 병환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는 자녀가 없어 쓸쓸히 떠났지만 홍콩 문예계가 장례를 치러주고 추도회를 거행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억왕손(憶王孫), 《청풍명월(清風明月), 《만하직금(晚霞織錦), 《장공학려(長空鶴唳), 《화주영웅(華胄英雄), 《후문탄협(侯門彈鋏) 등 40여 곡이 있다. 세 명의 하 씨 중에서 가장 많은 곡을 남긴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