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병재(何炳材, 1912519987)는 사완 북촌 학명리(鶴鳴里)에서 출생했다. 그는 6세에 주하이(珠海) 사당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1920년에 사완 여강학교(廬江學校) 고소반(高小班)으로 옮겨 학업을 계속하다가 1924년 광저우 박문학교(博文學校)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이후 1927년에는 홍콩 육재서사(育才書社) 초중반을 거쳐 1930년 중학교 졸업시험에서 고교과정 전면 장학금 수혜 기회가 주어지자 황인서원(皇仁書院)에 입학해 3년간 장학생으로 다니게 되었다.

 

그의 재학시절 1925623, 광저우시의 반제국주의 시위행렬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는 사면교(沙面橋)에서 제국주의자들이 여행자들을 총으로 사살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홍콩에서 공부할 때 외국인들이 종종 중국인들을 기만하고 압박하는 사건들을 접하게 되자 나라의 쇠약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1931년 여름, 그는 해군을 양성하여 조국을 구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안고 광저우의 황포군사학교(黃埔軍校)에 입학하게 된다. 입학성적 3등으로 그는 제19기 학생이 된다. 1932년 봄, 군벌이 정권을 탈취하자 당시 교장 진책(陳策)은 진제당(陳濟棠)에 의해 홍콩으로 피신하게 된다. 그래서 하병재는 홍콩으로 돌아와 다시 보인서원에서 계속 공부를 하게 된다. 그는 대학 예과반에 다니던 시절에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아 고민하던 중, 세관에서 시행하던 제3기 해사반(海事班) 학생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하게 된다. 해사반의 정식 명칭은 세무전문학교(稅務專門學校) 1분교였다.

 

19366, 하병재는 졸업 후 상하이 세관의 밀수담당 경비대에서 일하게 된다. 1937‘8.13사건 후에 밀수검거선 복성호(福星號)’를 타고 우쑹(吳淞)으로 돌아가던 중 일본 비행기의 공습으로 피격을 받는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1940년 봄, 하병재는 홍콩 구룡관(九龍關)춘성호(春星號)’라는 밀수감시선에서 1등 항해사 직책을 대리하게 된다. 영국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계속 전쟁을 확대하자 곧 중국 정부와 협상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춘성호를 포함한 세 척의 밀수감시선을 포함(砲艦)’으로 개조하고 홍콩을 지키게 된다. 이때 하병재는 장경호(長庚號)’1등 항해사가 된다.

 

194112,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홍콩이 함락되자 하병재는 부모를 찾는다는 핑계를 대고 아이는 사완의 옛집에 두고 아내와 함께 감죽탄(甘竹灘)을 몰래 건너 서강(西江)으로 가게 된다. 이후 다시 오주(梧州)를 담당하는 부감찰원이 된다. 19433, 그는 루펑(陸豊)의 세무서에서 주임이 되고 해안밀수감시선을 타고 일본 함선의 밀수동향을 감시하게 된다.

 

19443, 하병재는 총칭(重慶) 강무처(江務處)에서 선상을 측량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때 중국 정부는 해군을 모집해서 훈련을 시키고 미국이 보내준 군함으로 일본군에 대항할 계획을 하게 되는데 그는 3등의 성적으로 중위가 되어 이 부대에 편입하게 된다. 19464, 그는 훈련을 마치고 미국이 보내준 군함을 타고 귀국하던 중, 쿠바, 파나마, 맥시코, 미국 서해안의 샌디에이고, 하와이군도, 미드웨이 섬과 일본 등 7개 국가와 지역들을 방문하게 된다. 난징(南京)으로 돌아온 후에 소령이 되어 부함장이 된다.

 

194611, 하병재는 함장 겸 도선사가 되어 태평호(太平號)’, ‘중흥호(中興號)’, ‘영흥호(永興號)’, ‘중건호(中建號)’ 등 네 군함을 각각 이끌고 남해로 가서 서사군도와 남사군도를 접수하게 된다. 아울러 태평도(太平島)와 중업도(中業島)에서 직접 화강암으로 비석을 세워 그것이 중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하였다.

 

국민당이 항전 승리 후 내전을 일으키자, 하병재는 국가가 쪼개지는 것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고 내전에 분연히 반대했다. 이에 태평호로 전출시키는 것을 계기로 국민당의 해군에서 벗어나 상하이로 가서 상선(商船)의 선장, 1등 항해사 등의 직책을 맡게 된다. 국민당 해군사령부가 하병재를 지명 수배하자 그는 홍콩으로 달아나 구룡관(九龍關)해녕호(海寧號)’해강호(海康號)’의 밀수조사팀원으로 일하게 된다. 이후 그는 중국 공산당 지하당원인 임대기(林大琪), 이국안(李國安)의 권유로 구룡관 의거를 일으킨다. 195061327척의 의거 군함은 광저우항에 안착하게 된다.

 

해방 후 하병재는 중국의 사회주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오필달호(奧必達號)’의 선장, 교통부 광저우 항도공정국의 측량대장, 광저우 해운국 발해일호(渤海一號)’ 원양예인선의 선장, 준설선 중파우의호(中波友誼號)의 선장 등, 만 톤급 윤선의 선장을 두루 지냈다. 19657월부터 광저우 해운국 선원훈련원의 부주임 겸 훈련선장을 지내며 130명의 기관사와 선원을 양성했다. 그가 가르친 훈련원 중에는 기관장, 선장, 선원대장, 부국장 등의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이 적지 않았다.

 

1975년 하병재는 심근손상으로 퇴임을 하게 된다. 퇴직 후 중국의 항운사업의 발전을 위해 그는 1979<인도네시아 항로지침><중국항로지침>의 제1부분을 쓰게 된다. 또 해운국 선박기술연구소 고문으로 위촉된다. 1981년 고급공정사가 되고 19832월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는 영예를 얻는다. 1990년 하병재는 광저우 해운(海運)10대 공신 중의 한 명으로 추숭되고 1998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다. 하병재의 일생은 중국의 해운사업에 각별한 공헌을 남긴다. 그가 남긴 책은 다음과 같다.


*베이징인민교통출판사 출판

《선박의 손실방지와 구호

《해양과 항만의 선박예인 기술작업

 

* 광저우 해운국 선원훈련원에서 출판한 교재

《입항지침 

《선박예술

《선박조종

《선박용 영어(, )

 

*광저우 항해학회에 발표된 논문

《폭풍 속의 선박조종술

《항속 운항 중 충돌예방의 응용과 실제

《예인선 최소반경 회전의 조작경험과 분석

《연화산항로 운항의 분리제에 관한 가설

《충저우 해협 통항 분리제에 관한 가설 

《태풍을 이기는 법

 

*광저우 해운국 과학연구소에 발표된 논문

《화남경제항선

《충저우 해협 북수도 작용의 활성화 방안

20여 편의 논문이 있다.

그는 합리화 9회의 제안상, 1회의 과학기술 금상을 받는 등 7년간 우수 생산자라는 칭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