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죽군(張竹君, , 1867~1964)은 사완 기산촌(岐山村) 대항(大巷) 사람이다. 그의 증조부 장달재(張達材, 자는 연모廷模, 호는 재산梓山)는 차와 잠업, 포목 등을 업으로 삼으며 전심전력으로 그의 조카 장전전(張殿銓, 자는 형중衡中,호는 감호鑑湖)을 가르쳤다. 조부인 장전구(張殿球, 자는 윤중允中, 호는 벽동壁東)는 도광 28(1848)에 안휘성 흡현(歙縣)의 현승(縣丞)을 지내다가 후에 포정사리부(布政司理部)4급 벼슬에 임용되었다. 이후 조의 대부(朝議大夫)가 되었다가 벼슬을 사양하고 판위 사교국총리성국(沙茭局总理省局)에서 일을 보았다. 부친 장세증(張世蒸, 반조泮藻라고도 하며 자는 전려典麗, 호는 계하季霞)은 서예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장죽군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총명하여 새로운 사물을 습득함이 남달랐으며 교제에도 능하였다. 일찍이 광저우 남화의학교(南華醫校)에서 공부하다가 후에 하갈여자의학교(夏葛女子醫學校, 뒤에 하갈의원으로 개칭함)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1900년에 졸업을 하였다.

1901년 그녀는 광저우시 리완구(荔灣區)에 제복의원(褆福醫院)을 세우고 후에 다시 하이주구(海珠區)에 남복의원(南福醫院)을 세웠는데, 여기서 그녀는 광저우에서는 처음으로 내국인에 의해 건립된 병원의 여원장이 되었다. 효율적인 병원 운영을 위해 그녀는 1902년 싱가포르와 영국에 시찰을 갔었는데 싱가포르에서 서역(鼠疫)으로 무수한 사람이 목숨을 잃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1903년 광저우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그녀는 식수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당국에 건의사항을 제기했다. , 오염된 주강의 강물과 우물물을 마시지 말고 광저우 교외의 석문(石門)에서 배로 물을 끌어와 시민에게 공급하자는 것이었다. 당시는 수도가 공급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또 부패한 과일과 채소를 팔지 말고 환자 가족에게 환자의 오염물을 강과 하천에 버리지 말 것을 주장했다. 그의 건의는 난하이(南海)와 판위(番禺)의 현장(縣長)에게 접수되어 광저우 총독에게 보고되었다. 후에 광저우 시청은 퇴역한 4척의 군함을 이용하여 40척의 목선에 식수를 싣고 끌게 하여 광저우 시민에게 공급하였다. 이로 인해 전염병은 수주일 내에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장죽군은 여권(女權) 신장에도 앞장을 섰다. 그녀는 광저우에 육현여학(育賢女學)’을 창설하고 부녀의 11가지 난제(婦女的十一危難事)’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녀는, 여자는 재주가 없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는 중국의 봉건적인 사상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여자는 독서의 권리도 없고 경제적인 독립도 없으며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사덕(四德)에 묶인 불평등한 현실을 타파하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전족(纏足)과 매음(賣淫)에 반대하고 부녀해방을 주장했다. 광서 30(1904) 2,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녀는 구호대를 조직하여 요동반도에 갔었다. 그런데 전쟁이 이미 종식되자 돌아오는 길에 상하이를 지나게 되었는데 지역 유지의 완강한 권유로 상하이에서 의학 학교를 세울 결심을 하게 된다. 이때 그녀는 광동 의학계의 대표자 신분으로 상하이 만국적십자회에 참가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상하이에 거주하게 된다. 그리고는 바로 상하이에 진료소 간판을 내걸게 되었다. 1905년 그녀는 이평서(李平書)와 함께 여자중서의학원(女子中西醫學院)이라는 학교를 설립하고 장죽군은 원장에 취임한다. 당시로서 그것은 상하이 최초의 여의학원(女醫學院)이었다. 선통 원년(1909)에 그녀는 상하이의원의 감사(監事)가 된다.


선통 3년에 장죽군은 중국 적십자회의 창설을 발기하여 같은 해 1019일 성립을 달성하게 된다. 1025일 그녀는 적십자 구호대 120명을 인솔하여 우창(武昌)에 가서 의거를 일으킨 사상자를 구호하게 된다. 중화민국 2(1913)에 상하이에 디프테리아가 만연하자 그녀는 동분서주 모금을 통해 유행병 전문병원을 세우게 된다. 중화민국 6(1917)에는 건화이질원(健華頤疾院)을 세운다. 중화민국 8(1919)에 산동성에 기근이 들자 재난지역으로 달려가 구호활동을 펴게 된다. 같은 해 ‘2차혁명이 일어나자 그녀는 다시 적십자회를 조직하여 전선으로 뛰어든다. 당시 부총통을 맡고 있던 여원홍(黎元洪)이 그의 공로가 탁월함을 기리어 훈장을 수여했는데 이것이 중국에서는 여성에게 처음으로 수여된 훈장이었다.


중화민국 15(1926), 상하이에 콜레라가 유행할 때 그녀는 수많은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건화이질원(健華頤疾院)을 호서유행병의원(沪西時疫醫院)으로 개명하고 밀려드는 환자를 적시에 치료하게 된다. 또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병상을 증설하고 위중한 환자를 입원시키게 된다. 아울러 환자들의 부산물을 소각 처리하여 전염되는 경로를 철저히 차단하였다.

1932년에 1.28상하이사변이 일어나자 그녀는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명이 조수들을 데리고 심야에 조계지를 넘어 풍림교(楓林橋)를 오가며 군민을 구호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십구로군(十九路軍)이 상하이를 철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녀는 상하이에서 의술을 베푸는 일을 십 년을 하루같이 하루도 쉬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들로 하여금 큰 추앙을 받았다. 그녀는 친자식이 없었지만 많은 의붓자식을 두었고 그들을 훌륭하게 성장시켰다. 장죽군은 언제나 그의 스승이었던 하갈여자의학교 교장 리치 말리(Rich Marley, 미국인)를 존경했는데, 선교사인 말리가 상하이에 거주하는 광동인을 위해 예배당을 지으려고 하자 장죽군은 당시로서는 거금인 5000위엔을 쾌척하기도 했다.

그녀는 일생을 의학교육 사업에 매진하다가 말년에는 아무 재산도 남기지 않고 1964년 상하이에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