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언(何其言)의 자는 극간(克諫), 판위(番禺) 사완 사람으로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에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일생을 약초연구에 몰두했는데 그의 조카 하경설(何景雪)과 함께 사완 청라장(青蘿嶂)에 은거했기 때문에 스스로 호를 청라산(青蘿山) 도인이라고 했다. 영남 3대 시인 중의 하나인 진공윤(陳恭尹)은 하극간(何克諫)과 하경설(何景雪)에게 주는 시(寄懷何克諫、何景雪詩)를 남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가은처해운동) 그대의 집은 해운 동쪽에 숨어 있고

(소요청라일백봉) 청라 일 백 봉우리에 감겨 있네.

(초일부용삼사구) 연꽃 처음 피니 세 명이 시인이 생각나고

(서산미궐이현종) 서산의 고사리 보니 두 현자의 발자취가 생각나네.

(투간의방양구로) 낚싯대 드리운 갖옷 입은 저 노인

(부토신성마렵봉) 언젠가 무덤 속이 주인이 될 테지.

(유감구인가혜재) 약초로 사람을 구한 그 은혜 깊이 느끼며

(상사화몽야천중) 그대들 생각에 꿈은 천만 갈래라네.

 


그는 의사로서 병든 이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약초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여 광동에서는 최초의 약초서적인 《생초양성비요(生草藥性備要)라는 책을 편집해내었다. 이 책은 광동의 약초를 이용한 치료경험을 전문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그 안에 수록된 약초만 310종이 넘는다. 이 책은 상, 하 두 권으로 되어 있으며 상권이 서두에는 《생초약성서(生草藥性序)가 있고 하권에는 험방팔조(驗方八條)’가 부록으로 붙어 있다.

 


이 책에 실린 약초들은 대개 민간에서 탐방을 통해 얻은 것이다. 이 책의 형식은 문장이 과장되지도 않고 현학적인 체 하는 것도 없이 진실하고 소박하게 써내려간 것이 특징이다. 《본초강목(本草綱目)》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내용을 베껴가기도 했다. 후에 여러 차례 판각이 되어 청대 이래 광동의 310종의 민간 약초가 보존해 올 수 있었다. 이후 청대에 간행된 《본초구원(本草求原)》과 《영남채약록(嶺南採藥錄》의 많은 내용이 이 생초약성비요에서 한 글자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따온 것이다.

 


그는 또 《식물본초비고(食物本草備考) 상, 하권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식용하는 날짐승과 길짐승, 어류, 우유 종류, 채소, 과일 등에 대해 약리적인 효과와 인체에 미치는 독성을 체계적이고도 상세하게 분석하였다. 그리하여 가정생활에서 음식재료를 어떻게 취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참고서가 되게 하였다. 이 책 역시 여러 사람들에 의해 판각되어 일반인들로 하여금 상당한 추앙을 받게 되었다. 지금 이 책은 광동성 중산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진공윤(陳恭尹)은 그의 80세 생일을 기념하여 《하극간팔십(何克諫八十)》이라는 시를 바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라산중유모옥) 청라산 안에 초가집 있어

(토장려경유인축) 흙담에 조개 깐 길은 은자의 솜씨.

(춘래옥내옥외화) 집 안엔 봄이 들고 집 밖엔 꽃

(객좌전산후산죽) 손님은 앞산 보고 앉으니 뒷산은 대나무라.

(앙두량醖개수승) 한 동이 좋은 술 빚어 젓고 또 저어도

(가상소서한일속) 시렁 위엔 못 보낸 편지 한 다발.

(락락건곤각여현) 천하를 휘날리던 그대의 어짊을 생각하니

(탁관라복망여선) 대나무 갓에 베옷 입은 그대 신선 같네.

(정봉위수투간일) 마침 어르신 낚싯대를 던진 날을 맞으니

(응견희이대소년) 마땅히 희이(希夷: 당대 은사)를 보듯 좋은 해 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