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중(何博衆, 1820~1874)의 이름은 우의(羽儀)이지만 선제(仙儕)라는 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고요(何高堯)’의 넷째 아들이기 때문에 고향사람은 그를 일러 박중사(博衆四)라고 불렀다.

 


하박중의 부친 하고요는 70만 평방미터의 전답과 14칸의 집을 소유한 큰 부자였다. 그의 집은 지금의 사완의 북촌인 차피가(车陂街) 안에 있었는데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딴 고요거리(高堯巷)’가 생길 정도로 부자였다. 후에 고요거리를 나타내는 한자는 고요항(高瑶巷)’으로 바뀌었다.

 


하박중과 그의 형제들은 모두 부친의 덕으로 의식에 걱정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일생 동안 예술을 실천하고 연구함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가 어릴 때 마을에서 사숙할 때는 그 총명함이 남달랐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다재다능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서예를 좋아했고 그림에도 능했다. 사완의 특징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비파와 칠현금(七弦琴) 등이 현악기 연주에도 그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광동성 일대에 유행하던 월극(粵劇)의 기예에 심취하기도 했고 격정적인 광동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청 도광(道光) 연간(1835~1850)은 그가 16세에서 40세에 이르는 시기였는데 풍채가 출중하고 재능이 넘쳐서 민간예술의 연구와 창작 방면에 큰 공헌을 했다. 특히 광동 음악의 개혁과 창조에 특이한 기여한 바가 있어 그 명성이 중국의 여러 성에 전해졌다.

 


하장(何章)은 화단장(花旦章)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어릴 때 하박중 집의 종이었다. 하박중은 그가 말주변이 좋고 감정 표현이 풍부한 것을 보고 월극 공연의 제자로 키울만하다고 여겨 월극의 기본적인 공부를 전수해 주었다. 마침내 하장은 하박중의 가르침으로 조기 월극의 일대 명인이 되었다. 이후 그 둘은 계속 같은 길을 가다가 마침내 월극해금(粵劇解禁)’에 불후의 공헌을 남겼다.

 


하박중은 비파 연주에 능했다. 그는 특히 비파의 표현력을 더욱 풍부하게 하기 위해 열 개의 손가락을 모두 활용하는 연주기교, 십지비파(十指琵琶)’를 창안했다. 이 연주법은 사완 하 씨 비파의 독특한 연주법으로 훗날 손자들에 의해 탄탄한 기초를 다지게 되었고 이후 많은 사람들은 이 연주법을 따라하게 되었다.

 


그는 북곡(北曲)을 포함한 고곡(古曲)을 연구하기를 즐겨했다. 그는 고곡을 연주할 때 악곡에 화음(花音)을 넣어 장식음으로 삼아 그 소리가 감미롭고 우아하게 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이것은 후에 광동 음악의 색채를 나타내는 한 특징이 되었다. 그는 또한 민간에 유행하는 악보를 수집하고 정리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은 광동 음악을 보존하고 전파하는 데 있어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많은 광동 음악을 직접 창작하기도 했다. 그런데 악보에 작곡자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우타파초(雨打芭蕉)》와 《아마요령(餓馬摇鈴)》 초고 이외에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박중의 음악 예술에 대한 이러한 공적은 그의 후배인 하류당(何柳堂), 하여년(何與年), 하소하(何少霞) 등이 광동 음악을 대량으로 창작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